편안히 누워있다가 청혼아닌 청혼을 받았다.
"우리 이렇게 평생 같이 살래?"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알고 있는 그는, 결혼이라는 단어 대신, 같이 살자고 했다.
청혼스러운 말을 받았지만, 결혼 도장은 한동안 뇌리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친구와 내가 오래 함께 동행하며 살 것을 알고 있었다.
결혼 도장, 그리고 이를 넘어 예식에 대해 생각이 구체화된 것은 불과 몇 주 전이다. 휴학으로 학생 비자가 소멸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하지만 동시에 내년 미국의 작가 레지던시를 붙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처리하고 싶은 여러 작업들과 행사도 남아있었다.
선택지는 3가지가 있었다.
1. 여행 퍼밋으로 온다 (하지만 내가 이미 여행 퍼밋을 3개월을 꽉 채워 휴학 후에도 미국에 남아 있었다. 연속된 여행 퍼밋이 국경 심사대에서 통과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2. 아티스트 비자를 신청한다 (O1 이라고도 불리는 이 비자는 변호사 선임과 신청 비용이 최소 $5~6000이다. 그리고 내 작업과 경력이 기준에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3. 학생 배우자로써 F2 비자를 신청한다.
마지막 선택지가 마침 굉장히 편안했다. 신청이 쉬워서 편안한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언젠가 할 수도, 안할 수도 있었던 것을 그저 끌어 당겨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도장을 찍고, 찍는 김에 예식도 하기로 했다.
예식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전시와 통과 의례 사이의 느낌이다. 예식은 어느 정도 표준화된 틀이 있는 형식 안에서 나-파트너-공간-사진-이벤트-밥(작품 및 공간 설치) 등을 하객(관객)에게 내놓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있을 수 있는 기간 (12-1월 / 5-8월 초)을 활용해서, 전시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우리의 본분과 예산에 맞추어 짧고 굵게 준비하고자 한다.
<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 >에서 작가 헤셀홀트는 말한다. 자신은 아이와 어머니에 대한 주제를 작업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연약하거나 '그냥 엄마'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결혼, 임신, 출산 등 크고 작은 인생의 선택지와 항로에서 선 한 작가로서, 웨딩에 대한 글을 써도 되는지 나 또한 망설였다. 나 또한 '예비 신부' 혹은 '누군가의 아내'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나는 이 단어들을 아직 '작가'라는 정체성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작가의 '사적 영역'에서 주로 조용히 진행되는 결혼 준비가 하나의 정돈된 지식으로 남겨졌으면 해서이다.
현대미술작가는 질문을 자주 한다. 사회를 당장 눈에 띄게 바꾸지 못해도 우리는 질문을 남긴다.
시간을 들여 바라보았을 때 읽히는, 익숙치 않은 언어로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변화의 초석이 되길 고대한다.
결혼의 문화에 우리는 모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틀려도 되지 않을까?
나는 플래너를 쓰지 않는다.
스튜디오는 외가의 고향인 제주도에서의 스냅으로 대체한다.
웨딩홀은 비교 플랫폼을 이용해 투어를 신청한다.
청첩장은 판화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맡기고 싶다.
내 결혼식은 좋은 전시이자, 모두가 편하게 웃고 즐기다 가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로 해도 큰일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 미숙해도 괜찮다는 것을
결혼이라는 것이 나의 자아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임을 믿고 말하고 싶다.